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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_아크마토바_초상화_Kuzma_Petrov_Vodkin(0)[1].jpg

안나 아크마토바의 초상화(Kuzma Petrov-Vodkin)
필명(筆名)이 코렌코(Anna Andreevna Gorenko)인 러시아의 여류시인
아크마토바(Anna Akhmatova, 189-1966)에 대한 이야기다.

스탈린이 숙청정치를 할 때의 어느 날 아침에
감옥에 갇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나 짐 꾸러기를 전해 주려고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감옥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의 기다림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왜냐 하면 순전히 경비병들의 서슬이 퍼런 위엄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사여부를 모르는 가운데
끽소리도 못하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 전갈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이 때 한 여인이 시인을 알아 보고 다가와 물었다.
“이러한 기막힌 광경을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크마토바는 “할 수 있고 말고요.”하고 답하고 두 여인 사이를 웃으며 지나갔다.

아크마토바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왜 이 여인들이 거짓 웃음을 지으면서 미친 독재자 밑에서 신음해야 하는가?
그 여인들이 이미 겪고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왜 그렇게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비록 그 여인들은 스탈린이 씌운 굴레를 쓰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로이 그리고 소리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예언자들이 그러했듯이
소리 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마음 속으로 바른 소리를 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한 행동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믿음이 없고 의로움이 없는 시대에
그들은 예언자들처럼 미래를 예언하지 않고 현재를 말하였다.”

약 15년 전에 가톨릭 신학자 이자 신부인 트레이시(David Tracy, 1939- ; *주: 말만 무성하고 진실성이 없는 현 세태를 파헤치고 있는 『다원성과 모호성(Plurality and Ambiguity)』을 개신교에서 번역하여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는
『On Naming the Present Moment』라는 책을 썼다.  

이 책 속에서
그는 세속적인 문화에 젖어 있는 현 세대를
철학적으로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현대인들이 개방적인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의 편견을 선망하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훌륭한 의사가 우리들의 건강에 대하여 희망과 길을 제시하듯
트레이시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
오진이 엉터리를 말하고 아무 쓸모 없는 처방을 하기 때문에,
옳은 처방에는 옳은 진단이 필수불가결한 것과 같다.
내가 보기에는 오늘 날의 교회와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옳은 진단과 예언을 위해서는 현재의 우리들의 믿음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증세(symptom)란 확실히 병명을 모를 때 일컫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를 안다는 것 즉 제대로 안다는 것은 기도와 다름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가리켜 “이 시대의 징표를 읽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문화 그리고 성향, 종교적인 경향에 물들지 말고
혹시 공동체와 개인의 삶에서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예의 주시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나의 부모님은 이를 가리켜 “신성한 섭리”를 깨닫도록
즉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알아 들으려고 애쓰라고 하셨다.

성경에 이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와 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핵심으로 믿고 따라야 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사건만 보이고 주님의 섭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세속적으로 또 한낱 사건으로 비쳐졌을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항상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고,
믿는다는 것은 그 사건 속에서 주님께서 무슨 말씀하는 것인가를 알아 듣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알아 듣지를 못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전쟁에 졌지만
적이 막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전의 패배를 통하여 깨달으라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가뭄이 생겼을 때에는 지구온난화 때문에 생겼다고 믿고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고 깨닫지도 못했다.
그런 해에는 절약하면서 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을 몰랐던 것이다.
“사건”이 생길 때마다 주님의 뜻을 알리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항상 그들에게 닿아 있는 데도 그것을 모르고 항상 한낱 “사건”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맥키(James Mackey)는 “신성한 섭리”를
주님께서 그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깊은 뜻”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삶에 들어 오셔서
우리들의 경험으로 표현하신다.”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과 비슷하다.
우리들이 할 일은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인가를 제대로 읽는 것이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첫째로 우리들에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의로운가 아닌가를 예언자처럼 아는 것이고
둘째로 제대로 진단하여 우리들의 병을 제대로 치유하기 위하여 옳은 처방을 내리는 것이며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일종의 기도이기도 한,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아들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 모두 개방적인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의 신념에 휘둘리고 있다.
정치나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건이든 더욱더 사건을 예의 주시(注視)하고 더욱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모든 것이 치유되고 바로 잡아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사물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의 길
    아크마토바

어떤 사람은 바른 길을 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방황을 하면서,
떠나간 연인을 기다리거나,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한사코 가던 그 길을 따라가니
거기에는 슬픔이 있었다.
마치 탈선한 기차가 아무 데도 못 가듯이
어쩔 수 없이 오늘도 나는 결코 바르지도 않고 넓지도 않은 그 길을 간다.
(롤하이저 신부님의 묵상글을 편집)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