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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역사와 의미


1.역사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 예수님의 성탄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대림시기가  구제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면 성탄시기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심을 기념하는 시기로서,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부터 주님 공현 대축일 주간 또는 주님 세례축일까지이다.
그리스도 탄생으로 온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이 시기에 사제는, 어둠을 물리치고 새 생명과 새로운 광명이 떠오름을 찬미하며, 기쁨과 결백을 상징하는 백색 제의를 입는다. 성탄 시기는 4세기 중반부터 보편적으로 지내게 되는데,대림시기가 사순시기 관습을 본받아 생긴 것처럼 성탄시기 역시 부활시기를 모방한 기간으로서, 특별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시기는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의 역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수 성탄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2천년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사건을 기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해서는 복음서도 아무런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며, 초세기의 문헌에서도 일체 언급이 없다. 다만 12월 25일을 예수 성탄 축일로 지낸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한 자료는 354년에 로마에서 기록된 연대기이다. 이 책은 12월 25일을 로마 제국의 축일인 무적의 태양신 탄일(Nativitas Solisinvicti)이라 부르고 335-337년에 로마에서 예수 성탄 축일을 지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적의 태양신 탄일은 275년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완공한  태양신전 축성식을 기회로 12월 25일로 지정하였다.

4세기 초엽에 도입된 예수 성탄 축일이 태양신 축일과 같은 이유는 아마도 이 날이 세상의 빛(요한 8,12)이시며 정의의 태양(말라 3,20)이신 예수님의 축일로 지내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한 역사적 배경은 아직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후 4세기 말엽이나 5세기 초엽에 이 축일은 동방교회에도 전파되었다. 7세기경에는 성탄 한주간 뒤인 1월 1일을 성탄 제 8일 축일로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날에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의 탄생도 함께 기념하였다. 같은 7세기에 성탄 축일은 성탄 팔일 축제로  확장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부활과  성령강림 팔일 축제의 영향이 컸다.

한편 동방에서는 서방보다 조금 먼저 1월 6일을 주님 공현 축일로 지내기 시작하여 동방교회의 성탄 축일이 되었다.

2.현행 전례 제도

  성탄시기는 예수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의 제1저녁기도 또는 예수 성탄 전야 미사부터 시작하여 주님 공현주일 다음주일인 주님 세례 주일까지 계속된다.  그 기간은 약 2주간으로 부활 축제기간인 부활시기보다 훨씬 짧다.
교회는 성탄 대축일을 12월 25일 하루만 지내지 않고 다음 해 1월 1일까지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팔일 축제를 지낸다. 이 팔일 축제는 부활 팔일 축제와 함께 전례주년의 2대 팔일 축제이다. 따라서 이 기간은 성탄 본 날을 한 주간 더 연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이 기간은 성탄 본 날을 한 주간 더 연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부활 팔일 축제는 대축일임에 비해 성탄 팔일 축제는 한 등급 낮은 축일에 속한다. 또 사실상 이 축제기간의 대부분은 성인 축일로 구성되어 있다.  순수한 팔일 축제일은 12월 29-31일 사흘뿐이다.
그러나 다른 날에도 성탄 감사송을 바치는 등으로 축제 전례는 계속된다.
1)팔일축제 주일(주일이 없으면 12월 30일)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 성탄 다음 날인 12월 26일 :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3) 12월 27일 :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4) 12월 28일 :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5) 1월 1일 :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이자 천주의 성모 성 마리아 대축일.
6) 1월 2일과 5일 사이의 주일 : 성탄 제 2주일
                         (한국 교회에서는 이날을 주님 공현 대축일로 지냄.)  
7)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 : 성탄시기를 마감하는 주님 세례 축일.

이 축일 다음 날인 월요일부터 연중시기에 들어간다.        

성탄시기는 축제 기간이기 때문에 성탄 전야 미사부터 백색 제의를 사용하며 (성 스테파노축일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은 순교자 축일이기 때문에 홍색 제의 사용), 대림시기 중에 중단했던 대영광송을 노래한다.
특히 성탄 대축일의 모든 미사 중에 신앙 고백문을 외우거나 노래하는데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부분에서는 다른 날보다 특별히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탄 본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성탄, 천주의 성모 마리아, 주님 공현, 주님 세례 등의 축일과 성인 축일 미사 외에 이 기간의 미사 제1독서는 요한 1서이다.  요한 1서를 사용하는 이유는 요한 1서가 성탄과 공현의  신비를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으로 선포하기 때문이다.

3.성탄의 의미

예수 성탄 대축일은 천주 성자께서 동정 마리아 태중에서 혈육을 취하여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탄생하였음을 경축하는 날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성탄 축일에 예수님의 성탄과 밀접한 목동들의 방문, 동방 박사의 조배, 헤로데의 어린이 살해등의 사건도 함께 기념하였다.  그런데 라틴어의 '성탄(Nativitas)'은 이러한 생일의 의미 외에 신이나 통치자가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냄, 영광을 받음, 신이 됨(epiphaneia, theophaneia)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즉위일을 그가 신이 된 날로, 황제가 어느 도시를 공식 방문하면 신이 당신 모습을 드러낸 날로 기념하곤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서방교회의 성탄 축일은 동방교회의 공현 축일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날로 간주되었다. 단지 서방에서는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 축일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반면 동방에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공현 축일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어디에 더 비중을 크게 두든지 성탄 축일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비천하고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날이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신 날이다.
하느님께서 비천한 인간이 되신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인류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또 다른 성탄의 신비가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산의 지존하신 본성을 더없이 낮추시어 죄와 고통과 죽음의 본성을 지닌 인간이 되시어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터전을 마련하셨다.  그래서 성탄을 하느님과 인간의 '기묘한 교환'이라고도 한다.  
이 기묘한 교환은 성탄과 부활의 깊은 관계를 들어낸다.  예수님께서는 탄생과 더불어 당신의 지상 생활의 목적인 십자가와 수난을 통한 부활의 여정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 축일과 공현 축일은 파스카 여정의 준비이자 시작이라 할 수 있다.

4.구유 예절

구유는 어린이와 어른할 것 없이 모든 이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구유에 누워계신다. 그 주위에는 나귀도 있고 소도 양도 있다. 이 모습은 하느님께서 두려운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보는 이는 정겨움과 사랑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성탄을 묘사하는 그림들은 이미 카타콤바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석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대의 예술가들이 구유를 어떻게 꾸몄든지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다. 중세기의 많은 성화들 안에서 예수님의 성탄을 묘사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구유의 증거는 성 프란치스코가 그레쵸(Greccio: 이탈리아의 동네 이름)에 만든 것이다.  그는 예수님 탄생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여기에서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했다.

구유와 성화로 예수님 탄생의 현장을 재현해 놓고 거기에서 미사를 드리는 관습이 중세기의 신심과 연결되어 빠르게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 장면을 바라보는 이는 단순히 구유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하며 흐뭇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신비를 믿음으로 깨닫고 그 신비에 젖어들어야 한다.

5. 예수 성탄 대축일[12월25일]

  1). 전례
  예수 성탄 대축일 전례는 4대의 미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모든 미사의 기도, 독서, 노래, 감사송 등을 합치면 경문이 44개나 된다.  먼저 이 전례는 12월 24일의 전야 미사부터 시작한다.
24일의 아침 미사만 하더라도. 대림시기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반해 전야 미사의 미사경문은 이미 성탄에 관련된 주제나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본기도는 아직도 '해마다 우리 구원의 축제일을 기다리는"이라고 말하지만 예물기도나 영성체후 기도는 성자의 성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축제 미사는 밤미사부터 시작한다.

서방 교회는 예수 성탄 대축일을 파스카의 성삼일 다음으로 가장 성스럽게 지낸다.  이날에는 파스카의 성야 예식과 같은 특별 전례 행사는 없고 그 대신에 대 그레고리오 교황(+604) 이래 축일 미사를 밤중 미사와 새벽 미사 및 낮 미사등 세 번 거행한다.  이렇게 이날의 전례는 미사가 중심이며 절정이다.  크리스마스라는 말도 성대한 성탄 밤 미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사제는 이날 예외적으로 혼자 또는 공동 집전으로 세 미사를 다 거행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세 미사를 다 드려야 할 의무는 없다.  미사 예물은 예외적으로 세 대 다 받을 수 있다
  
6. 성탄에 듣는 용어들
  
<탄생지 베들레헴>
루가는 마리아와 요셉이 나자렛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다(2,39에서 나자렛을 '자기 고향'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인구 조사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했고, 드디어 아기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반면 마태오는 마리아와 요셉의 집에 아예 베들레헴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2,11) 차라리 그들이 이집트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나자렛으로 이사하여 살게 된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2,22-23). 비록 로마 인구 조사의 역사성에 대한 문제와 부정확한 점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루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기쁜 소식(복음)의 선포로 려겼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루가의 신학적 풍요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루가는 로마의 인구 조사라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이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10절), 즉 세계적 사건으로 묘사했다.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시라는 것이다.

<첫아들(2,7)>

그들이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다.이스라엘 전통상 처음으로 아들을 얻으면 그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로 여겼다. 그래서 그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여기서 "첫아들"이라는 말은 처음으로 낳은 사내아이는 하느님께 바치라는 율법을 되새기는 말이다(출애 13,12;34,19; 참조 : 루가 2,23).첫아들은 또한 상자 상속권을 갖는다(참조 : 창세 25,29). 외아들도 그런 의미에서는 첫아들이다. 예수님의 경우 첫 아들이란 말은 율법에 따라 이 아들이 다윗의 왕자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는 뜻을 강조하는 것이지 마리아가 그후 다른 자녀들을 두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구유, 포대기>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다"(2,7). '구유', '포대기'에 대해서 루가 복음사가의 의도와는 달리 많은 해석이 있었고 해마다 강론 소재에 이것들이 등장했다. 예루살렘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왔기 때문에 '자리'가 없었다거나, 예수님의 부모님의 미력함에서 오는 고충, 심지어 여관 주인이 잔학하고 불친절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있을 정도였다. 또 전통적으로 구유와 포대기는 위대한 메시아가 비천아게 태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은 이 구절을 성서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중세 후기의 경건한 신심에서 나온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구약성서 두 구절이 루가의 본래 의도를 밝혀 줄 것이다:
  ① 첫째 구절은 이사 1장 3절이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 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이 없구나." 뜻인즉 소와 나귀도 제 주인을 알고 제 생명의 양식을 찾을 곳, 즉 요람 혹은 구유를 챙길 줄 아는데 이스라엘은 제 주님의 탄생이라는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이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았다. 목자들은 생명의 근원을 찾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목자들이 구유에 누운 아기를 발전하도록 이끌어 주셨고 그들은 주님의 구유를 알아보았다.

  ② 둘째 구절은 지혜 7장 4-5절이다: "나는 기저귀에 싸여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다. 왕이라고 해서 유별나게 인생을 시작하지 않는다." 솔로몬이 자기 고백으로 되어있는 이 구절에서 자기가 태어났을 때 기저귀에 싸였다고 말한다. 그는 다윗 왕의 아들, 왕자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도 기저귀에 싸였다. 이렇게 볼 때 기저귀(포대기)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가난한 상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왕자, 제왕, 다윗의 아들을 시사하는 말이다.이것을 구약성서 구절로만 볼 것이 아니라 루가가 조명하고자 하는 사건이라는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보면 예수님의 탄생의 신비에 보다 깊은 통찰과 이해가 생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고을인 베드레헴에서 나셨다. 여관이 아니라 구유에 나심으로써 당신 백성의 기둥이며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을 상징한다.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있다고 해서 그가 왕손의 혈통이라는 점과 모순될 것은 없다. 왕이라 해서 인생을 우별나게 시작하지 않는다.

<목자>

루가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처음으로 목자에게 전해졌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목자란 과연 어떤 인물들인가?  사람들은 흔히 루가가 묘사한 목자들은 양떼의 유순함을 지닌 이들이며 그래서 성탄절의 상징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관심사들은 루가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한편 성조들과 다윗이 목자였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1사무 17,15.2834-35; 2사무 7,8; 시편 78,70-72).그러나 목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후기 랍비 문학에서는 종종 목자들을 부정직한 인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들은 남의 풀밭에 짐승을 풀어놓아 풀을 뜯기는가 하면 주인 몰래 양과 염소의 젖을 내다 팔거나 또는 양털을 팔아먹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 죄인으로 취급받았다.그들은 멸시받는 계층이었다.  목자들에게는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가난하고 , 돈도 권력도 배운것도 없는 이 못난 사람들에게 최초로 구원의 메시지가 전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적부터 천민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말하려는 뜻이 엿보인다.  

<목자들에게 선포된 메시지>

루가 복음에서 목자들에게 선포된 메시지는 두 가지다.  첫째, 구세주 탄생에 관한 선포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2,10b-11).  천사의 메시지는 '기쁜 소식'의 선포이며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기쁨'이 될 소식이었다.  천사는 태어나신 예수님을 '구세주', '주님', '그리스도'시라고 하면서 세 가지 존칭을 예수님께 적용한다.  이러한 기쁜 소식은 이스라엘의 희망,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직결되어 있다.
미가의 예언에 따르면 베들레헴은 '다윗의 아들'이 태어날 고을이다(5,2-4).  천사는 미가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선포한다.  '오늘'  태어나신 것이다.  루가 복음에서 '오늘'이란 말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실현이라는 특별한 여운을 갖고 있다(참조 : 4,21; 19,9; 23,43).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해서, 초대 교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했다.
두 번째 천사의 선포는 첫 번째 것과 성격이 다르다.  선포라기 보다는 차라리 찬송이다.  이 찬송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이 부르짖었던 환호와 형식상으로 같다: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19,38),  '영광'은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인간을 위해 취하신 강력한 행동을 경험하고 인자함을 의미한다.  '평화'는 전쟁이나 재난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지고지선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여기서 평화는 하느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백성간에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 하심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