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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어둠의 광채’를 읽고

신부님께
주일 오후, 오랜만에 오른 호젓한 산길에 노란 산국
이 먼저 웃으며 반겼습니다. 신부님 계신 곳에도 이젠
가을빛이 아쉬움을 남기며 이울고 있겠지요. 오늘 성당
에 다녀와 책장을 정리하다 신부님께서 언젠가 제게 주
신 책 한 권이 눈에 띄었습니다. 책 표지를 넘기니 신부
님 육필로 “파비올라, 늘 기쁨으로 살자구.”라고 적혀
있더군요. 신부님께서 강론 때나 만남의 자리에서 제
일 많이 하신 말씀이 기쁨으로 살라는 것이었어요.
    
신부님께서 우리 본당을 떠나신 후 그 말씀을 유언
처럼 받들고 기쁘게 살겠노라고 다짐했지만 부끄럽게
도 제 의지가 강하지 못했어요. 거울 속 제 표정에는
환한 기쁨의 빛보다 우울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을 때가 더 많았지요.
            
신부님, 이 세상엔 우연이란 게 없다고 하셨던 말씀
이 생각납니다. 그렇다면 한 보름 전 제 손에 들어온
문고판 작은 책자 ‘어둠의 광채’는 분명 인자하신 주님
의 섭리로 제게 전해진 희망서였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신앙의 비밀을 밝힌 책’이란 표지 글
에 호기심이 생겨 베개 위에 엎드린 채 단숨에 읽어
버린 책, 저는 사뭇 신비스런 느낌으로 여운에 잠겨 책
장을 몇 번이나 다시 넘겼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인도의 콜카타에서 하느님의 소명
에 답하여 사랑의 선교 수녀회와 수사회를 설립하였
지요. 수녀님의 자선 행위는 가톨릭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깊은 감동을 주고
성녀로 추앙받기까지 하였지요. 주름진 얼굴에 언제나
환한 미소를 띠고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던 데레
사 수녀님! 수녀님의 마음속에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
워져 있을 거라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데
레사 수녀님은 피카시 주교님께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어두움은 너무 어둡고 괴로움은 너무 괴롭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어두움이든 괴로
움이든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며, 하느님께서 받아 주시
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드릴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접하며 데레사 수녀님이 신앙인으
로서 진정 위대한 점은 어둔 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사
랑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예수님께 버림받은 듯한 고통스런 심경을 차마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힘들어했지만 얼마나 주님을 신뢰하
며 사랑하였는지는 반 데 피트 신부님께 쓴 편지에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제 사랑은 점점 더 단순하고 개인적
이 되어 가는 듯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괜찮다고 하신
다면 제 마음 따위, 심지어 제 안에 계신 예수님을 둘
러싼 어두움까지도 개의치 마시고 편안하게 계시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 전부
이며 저는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합니다.”
                      
얼마나 큰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데레사 수녀님을 괴롭혔던 그 어둠은 영혼 정화를 위
한 은총의 용광로였습니다.
            
신부님,
현대를 ‘위기의 시대’라고 하더군요. 저도 각종 매체
를 통해 쏟아지는 그릇된 정보와 지식에 현혹되어 신
앙의 위기를 실감하였습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에 제
신앙의 얕은 뿌리가 통째로 뽑혀 버릴 것 같은 아찔한
순간이 더러 있었습니다. 제 표정에, 아니 내면에 짙게
드리워진 어둠의 정체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
우울, 불안감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일 것입니다.
              
데레사 수녀님께 드리워졌던 그 어둠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겠지요. 하지만 데레사 수녀님은 깊은 연민을 품
고 제게 다가와 애절하게 말씀하시는 듯하였답니다.
“네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고 싶다면 지극히 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완전히 신뢰하며 매달려라, 내가
그러하였듯이.”
                
저는 감히 데레사 수녀님을 흉내 내어 하느님께 기
도를 드립니다.
“주님, 이 죄인이 감히 청하오니 괜찮으시다면 제 좁
고 어두운 마음속에도 머물러 주십시오. 제 사랑의
처음도 끝도 모두 주님이게 해 주세요.”
                  
신부님!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호젓한 산길에서 만난 산
국처럼 제 마음 환해진 것 같습니다. 늘 부족한 제 얘
기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삼천포항의 은빛
비린내가 그리우시다면 언제든 꼭 한 번 와 주시길 고
대하겠습니다.



시월의 끝자락에서 파비올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