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5월호 <113~115페이지>에
게재된 교구평협회장님의 신앙이야기 내용입니다
제목 : 나의 신앙 이야기
그저해야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어린시절 맡던 풀 내음과 소죽 끓이던 솥에서 볏짚 익어가는 냄새,
그리고 자상하면서도 위엄 있었던 아버지의 몸에 흠뻑배인 땀 냄새, 허기졌을 때 밥상을
차려 주시던 그 그리운 할머니의 향기,욕심내며 동생들과 다투면 부지깽이 들고 쫓아오시던
어머니의 잔소리....이런 아련한 그리움 가득한 제고향에... 이제는 고향의 시냇물
소리는 간데없고 공장기계소리가 들린답니다.
하지만 나즈막한 언덕배기 성모동산에서 성모님이 순교자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지켜
주는 듯 변함없이 바라보고 계시는 이곳은 고조모로부터 5대째 내려오는 가등이라는
구교우촌입니다.
8남매 모두 부모님에게 신앙을 물려받아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처럼 세례의 감동을 절실히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1코린15,10 참조)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세례를 받은 후에도 종종 선택의 기로에 놓였지만
그때마다 신앙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힘이컸고 그것을 이루어지게 해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에는 조과,만과,매괴신공은 물론 성로신공
까지 온가족이 둘러앉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도를 바치며 가랑비 옷 젖는 줄 모르게
신앙심이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대구댁이라고 불리는 이웃 할머니집에서 무당 굿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문득
부모님에게 전해들은 성수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그래서 복사를
서던 친구와 함께 집에 있는 성수를 솔가지에 적셔 굿판 주위에 뿌리고 별 생각없이 집에와
잠을 잤습니다.그런데 새벽 동뜰 무렵 그 할머니가 저희집에 오셔서 아버지에게 당신아들이
어제밤에 물을 뿌리고 난 뒤 밤새도록 굿이 되지 않았으니 굿 값을 물어 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굿 값을 물려주기는 커녕 그 할머니를 세례받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보면서 성수의
위력을 처음 체험했습니다. 그뿐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던
공소시절, 한 달에 한두 번씩 오시는 신부님곁에서 복사를 서면서 눈여겨 보았다가 어른들 몰래
흉내내곤 하였습니다.
골방에서 문을 잠그고 신문지를 오려 제의를 만들어 입고는 어린동생 4명을 앉혀 놓고
명절날 먹다가 남은 떡국가래를 제병삼아 미사봉헌하는 흉내를 냈던 것입니다.
지금도 명절 때 가족들이 모이면 기분좋게 놀려되는 추억거리랍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속에서 저는 당시 함안본당 이종창 바르톨로메오 신부님의 추천으로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의 소신학교격인 성마오로 기숙사에서 중,고등학교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마산교구장이신 김수환 주교님에게 견진성사도 받았지만 수도성소가 부족하여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평신도로서 봉사와 증거의 삶을 살도록
허락해주신 주님의 오묘한 섭리에 오로지 감사드릴 뿐입니다.
결혼 후 두 아들을 둔 제가 공직생활을 하면서 비상근무등의 이유로 주일을 자주 못 지키게
되자 아버지께서 제 직장상사에게 “주일을 지키게 해주시든가 아니면 사표 수리해 주시라”
는 신비로운? 협박을 하셨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덕분에 2012년 공직생활을 끝낼 때
까지 주일을 거룩하게 보낼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은총이며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반송본당 주임이셨던 강영구(姜榮求 루치오) 신부님께서 저를 포교분과
위원과 사회복지분과장으로 임명하시면서 사목회에 처음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 평신도 주일에 당시 정흥식(鄭興植 마르코) 주임신부님 사목시에 본당사목회장이
되자 어머니께서는 ‘공직 생활만도 힘들 텐데’ 라고 걱정하시며 저에게 한가지 약속하자고
하셨습니다. 출퇴근할 때 새벽 미사참례는 물론 매일 성체조배 후 성당 구석구석을 살펴본 뒤
집에 오라는 것이였습니다. 본당회장은 머슴으로서 신자인 주인보다 먼저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잠들어야 한다는 겸손과 섬김,봉사정신을 강조하신 말씀이였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저녁기도를 함께 하려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제가 레지오 마리애
회합 후 단원들과 한잔하고 늦게 귀가했더니 어머니는 두 손자들과 막 저녁기도를 마친 참
이 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묵주를 꺼내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손자들에게 아버지
로서의 모범을 보여주려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항상 지니고 다녔던 묵주가 그날따라 담배갑 꺼내다가 떨어뜨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결국 어머니는 제 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저를 무릎꿇리고 벌을 세우셨습니다.
당시에는 어머니가 밉기도 했지만 그것이 신앙교육이였음을 알기에 이제는 그립기만 합니다.
그 이후로는 곳곳에 묵주를 보관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인자하신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제 아내에게 끼니때 마다 식구 수대로
쌀 한 숟가락씩 예수님 몫으로 덜어내게 하신 뒤, 매 주일에 봉헌하여 본당 성미함에 넣거나
독거어르신의 양식으로 쓰이게끔 하십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제가 매일을 생애 마지막처럼
생각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미사로 하루의 빗장을 열고 저녁기도로 하루를 마감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2008년도에는 이제민(李濟民 에드워드)신부님 권유로 교구 상장례지도사를 취득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의 죽음을 하나의 완성으로 받아들여 이 세상과 화해하고 하느님을 선택
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의심할 것이냐’ 하는 것은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순간 좌도와
우도의 엇갈린 선택처럼 우리들도 결단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당연령회장으로서 선종하신 분들의 육신과 영혼을 위해 염습봉사와 장지수행을 하는
동안 신앙은 우리의 생활이라는 것과 기도없이 활동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선종한 교우는 성체를 모신 성령의 궁전이자 그리스도와 일치된
몸이기에 가톨릭 정신이 없는 일반상조회나 외교인 염습자에게 함부로 맡겨서는 안 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인의 존엄을 생각하면서 염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끝에 교구 연령연합회 회장까지 맡게되어 어떤 사업을 할까 고민하다
기존 염습 봉사 외에도 재능기부를 해주신 봉사자들과 함께 교세가 열악한 농어촌 본당을
순회하기로 하였습니다. 무료 장수사진 촬영과 미용봉사, 그리고 전신자들에게 짜장면
대접을 하면서 농촌본당 신자들과 일치와 친목의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교구 신부님이 선종하셨을 때, 이철민(李哲敏 안토니오) 담당신부님과 함께 선종
하신 신부님의 염습봉사와 장례의전을 수행한 것은 큰 은총이였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거나 감투를 좋아한다느니 하는 시샘에 찬 소리가
들려 올 때는, 뭐라 항변할 수도 없어 그냥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럴수록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성경 말씀과 기도안에서 인내할 수 있도록 성령께 의지하며
노력했기에 이런 분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도우심,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가슴 아팠던 일은, 예전에 아버지 임종도 보지 못했는데
2010년 인근본당 신부님의 부친께서 선종하셔서 염습봉사하러 갔다가 제 어머님의 임종
마저 보지못한 일입니다. 임종 직전에 어머니와 가족들이 저를 찾았다는 말에 더욱 가슴에
한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리고 부모님께서 제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용서해
주시리라 믿으며 늘 기도합니다.
교황님의 한국방문을 맞아 한국교회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순교자의 후손답게 백색순교의 정신으로 뼈를 깍고 피를 바꾸는 각오로 가정성화는
물론 교구와 본당공동체에 봉사한다면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자식들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내 발자국이, 마침내 후세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17,10)라는 말씀에 충실하고자 스스로
다짐하곤 합니다. 물은 셀프이고 목포는 항구이고 침대과 과학이라면 신앙은 생활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고 2,14)
2014. 4
마산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회장
김덕곤 요한
게재된 교구평협회장님의 신앙이야기 내용입니다
제목 : 나의 신앙 이야기
그저해야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어린시절 맡던 풀 내음과 소죽 끓이던 솥에서 볏짚 익어가는 냄새,
그리고 자상하면서도 위엄 있었던 아버지의 몸에 흠뻑배인 땀 냄새, 허기졌을 때 밥상을
차려 주시던 그 그리운 할머니의 향기,욕심내며 동생들과 다투면 부지깽이 들고 쫓아오시던
어머니의 잔소리....이런 아련한 그리움 가득한 제고향에... 이제는 고향의 시냇물
소리는 간데없고 공장기계소리가 들린답니다.
하지만 나즈막한 언덕배기 성모동산에서 성모님이 순교자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지켜
주는 듯 변함없이 바라보고 계시는 이곳은 고조모로부터 5대째 내려오는 가등이라는
구교우촌입니다.
8남매 모두 부모님에게 신앙을 물려받아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처럼 세례의 감동을 절실히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1코린15,10 참조)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세례를 받은 후에도 종종 선택의 기로에 놓였지만
그때마다 신앙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힘이컸고 그것을 이루어지게 해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에는 조과,만과,매괴신공은 물론 성로신공
까지 온가족이 둘러앉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도를 바치며 가랑비 옷 젖는 줄 모르게
신앙심이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대구댁이라고 불리는 이웃 할머니집에서 무당 굿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문득
부모님에게 전해들은 성수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그래서 복사를
서던 친구와 함께 집에 있는 성수를 솔가지에 적셔 굿판 주위에 뿌리고 별 생각없이 집에와
잠을 잤습니다.그런데 새벽 동뜰 무렵 그 할머니가 저희집에 오셔서 아버지에게 당신아들이
어제밤에 물을 뿌리고 난 뒤 밤새도록 굿이 되지 않았으니 굿 값을 물어 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굿 값을 물려주기는 커녕 그 할머니를 세례받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보면서 성수의
위력을 처음 체험했습니다. 그뿐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던
공소시절, 한 달에 한두 번씩 오시는 신부님곁에서 복사를 서면서 눈여겨 보았다가 어른들 몰래
흉내내곤 하였습니다.
골방에서 문을 잠그고 신문지를 오려 제의를 만들어 입고는 어린동생 4명을 앉혀 놓고
명절날 먹다가 남은 떡국가래를 제병삼아 미사봉헌하는 흉내를 냈던 것입니다.
지금도 명절 때 가족들이 모이면 기분좋게 놀려되는 추억거리랍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속에서 저는 당시 함안본당 이종창 바르톨로메오 신부님의 추천으로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의 소신학교격인 성마오로 기숙사에서 중,고등학교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마산교구장이신 김수환 주교님에게 견진성사도 받았지만 수도성소가 부족하여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평신도로서 봉사와 증거의 삶을 살도록
허락해주신 주님의 오묘한 섭리에 오로지 감사드릴 뿐입니다.
결혼 후 두 아들을 둔 제가 공직생활을 하면서 비상근무등의 이유로 주일을 자주 못 지키게
되자 아버지께서 제 직장상사에게 “주일을 지키게 해주시든가 아니면 사표 수리해 주시라”
는 신비로운? 협박을 하셨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덕분에 2012년 공직생활을 끝낼 때
까지 주일을 거룩하게 보낼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은총이며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반송본당 주임이셨던 강영구(姜榮求 루치오) 신부님께서 저를 포교분과
위원과 사회복지분과장으로 임명하시면서 사목회에 처음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 평신도 주일에 당시 정흥식(鄭興植 마르코) 주임신부님 사목시에 본당사목회장이
되자 어머니께서는 ‘공직 생활만도 힘들 텐데’ 라고 걱정하시며 저에게 한가지 약속하자고
하셨습니다. 출퇴근할 때 새벽 미사참례는 물론 매일 성체조배 후 성당 구석구석을 살펴본 뒤
집에 오라는 것이였습니다. 본당회장은 머슴으로서 신자인 주인보다 먼저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잠들어야 한다는 겸손과 섬김,봉사정신을 강조하신 말씀이였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저녁기도를 함께 하려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제가 레지오 마리애
회합 후 단원들과 한잔하고 늦게 귀가했더니 어머니는 두 손자들과 막 저녁기도를 마친 참
이 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묵주를 꺼내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손자들에게 아버지
로서의 모범을 보여주려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항상 지니고 다녔던 묵주가 그날따라 담배갑 꺼내다가 떨어뜨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결국 어머니는 제 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저를 무릎꿇리고 벌을 세우셨습니다.
당시에는 어머니가 밉기도 했지만 그것이 신앙교육이였음을 알기에 이제는 그립기만 합니다.
그 이후로는 곳곳에 묵주를 보관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인자하신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제 아내에게 끼니때 마다 식구 수대로
쌀 한 숟가락씩 예수님 몫으로 덜어내게 하신 뒤, 매 주일에 봉헌하여 본당 성미함에 넣거나
독거어르신의 양식으로 쓰이게끔 하십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제가 매일을 생애 마지막처럼
생각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미사로 하루의 빗장을 열고 저녁기도로 하루를 마감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2008년도에는 이제민(李濟民 에드워드)신부님 권유로 교구 상장례지도사를 취득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의 죽음을 하나의 완성으로 받아들여 이 세상과 화해하고 하느님을 선택
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의심할 것이냐’ 하는 것은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순간 좌도와
우도의 엇갈린 선택처럼 우리들도 결단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당연령회장으로서 선종하신 분들의 육신과 영혼을 위해 염습봉사와 장지수행을 하는
동안 신앙은 우리의 생활이라는 것과 기도없이 활동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선종한 교우는 성체를 모신 성령의 궁전이자 그리스도와 일치된
몸이기에 가톨릭 정신이 없는 일반상조회나 외교인 염습자에게 함부로 맡겨서는 안 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인의 존엄을 생각하면서 염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끝에 교구 연령연합회 회장까지 맡게되어 어떤 사업을 할까 고민하다
기존 염습 봉사 외에도 재능기부를 해주신 봉사자들과 함께 교세가 열악한 농어촌 본당을
순회하기로 하였습니다. 무료 장수사진 촬영과 미용봉사, 그리고 전신자들에게 짜장면
대접을 하면서 농촌본당 신자들과 일치와 친목의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교구 신부님이 선종하셨을 때, 이철민(李哲敏 안토니오) 담당신부님과 함께 선종
하신 신부님의 염습봉사와 장례의전을 수행한 것은 큰 은총이였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거나 감투를 좋아한다느니 하는 시샘에 찬 소리가
들려 올 때는, 뭐라 항변할 수도 없어 그냥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럴수록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성경 말씀과 기도안에서 인내할 수 있도록 성령께 의지하며
노력했기에 이런 분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도우심,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가슴 아팠던 일은, 예전에 아버지 임종도 보지 못했는데
2010년 인근본당 신부님의 부친께서 선종하셔서 염습봉사하러 갔다가 제 어머님의 임종
마저 보지못한 일입니다. 임종 직전에 어머니와 가족들이 저를 찾았다는 말에 더욱 가슴에
한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리고 부모님께서 제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용서해
주시리라 믿으며 늘 기도합니다.
교황님의 한국방문을 맞아 한국교회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순교자의 후손답게 백색순교의 정신으로 뼈를 깍고 피를 바꾸는 각오로 가정성화는
물론 교구와 본당공동체에 봉사한다면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자식들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내 발자국이, 마침내 후세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17,10)라는 말씀에 충실하고자 스스로
다짐하곤 합니다. 물은 셀프이고 목포는 항구이고 침대과 과학이라면 신앙은 생활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고 2,14)
2014. 4
마산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회장
김덕곤 요한